인동초의 '동지' 이희호, 97년의 삶 돌아보기

[더구루=홍성일 기자] 2019년 6월 10일 오후 11시 37분. 

 

'DJ의 영원한 동반자' 이희호 영사가 영면에 들었다. 

 

대한민국 1세대 여성운동자, 민주투사, DJ의 정치적 동지, 대한민국 영부인까지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을 되돌아보려한다. 

 

◇신식교육을 받다

 

1922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희호 여사는 남아 선호 사상이 지배하던 그 시대에 아들딸을 차별하지 않던 부모 밑에서 성장했다.

 

이는 그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 

 

'희호'라는 이름은 돌림자인 '호'를 넣어 아버지가 붙여주신 이름이다. 이는 아들들과 차별하지 않았던 그의 부모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그의 어머니는 딸을 공부시켜야 한다는 열의가 매우 강했다. 

 

하지만 이희호 여사가 18세가 되던 해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이희호 여사는 "학업을 마칠 때까지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고 한다. 

 

이희호 여사는 이화여전(현 이화여대)과 서울대에서 공부한 후 1954년 8월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그곳에서 램버스 대학과 스카릿 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1958년 귀국한다. 

 

학문과 사회운동의 갈림길에서 이희호는 대한YWCA(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를 선택하며 사회운동가의 길을 걷게된다. 

 

◇인동초와 함께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와의 첫 만남은 1951년 피란민이 모여들던 부산에서 였다. 

 

당시 DJ는 해운회사를 운영하고 있었고 전쟁통에 부산으로 거점을 옮기게 됐다. 

 

그곳에서 대한여자청년단 간부였던 김정례의 소개로 두 사람은 처음 만나게 된다. 

 

그리고 '면우회' 모임에서 김대중과 이희호는 시국 등을 토론하며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아나갔다.

 

이후 김대중과 이희호는 다른 길을 걸어가지만 말벗으로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지켜나갔다.

 

이 시기 김대중은 처였던 차용애씨와 사별하고 3, 4, 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내리 낙선하는 등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김대중은 말벚인 이희호를 찾아 대화하며 위로를 받았고 서로에 대한 감정을 쌓아나갔다. 

 

그리고 1962년 촉망받던 여성운동가 이희호는 빈털터리에 아이가 둘 딸린 김대중과 결혼을 하게 된다. 

 

당시 이희호 여사가 김대중 대통령과의 결혼을 알리자 주변 사람들이 많이 반대를 했다. 

 

하지만 "내가 도와야 할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희호의 단호한 태도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던 사람들도 더 이상 반대 할 수 없었다. 

 

그들의 동행에 먹구름이 드리운 것은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46%의 득표율로 낙선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위기감을 느낀 1972년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으로 망명할 수 밖에 없었다. 1973년에는 '김대중 도쿄납치사건'도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사후 잠시 정치활동을 재개하지만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1980년 내란음모 사건에 휘말려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는 미국으로 망명하게 되고 이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지만 50여차례가 넘는 연금을 당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럴때마다 이희호 여사는 김대중 대통령을 강하게 붙들었다. 

 

"더 강한 투쟁을 하시라", "무엇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알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라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낸 이희호 여사의 편집에서 이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 이희호 여사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청와대에 입성한 이희호 여사는 대통령 부인을 부르는 명칭을 '영부인' 대신 '여사' 바꾼다. 

 

"대통령 부인이기 전에 '나 자신'이고 나이도 들었으니 여사로 불러주면 좋겠다"고 말한 이희호 여사의 건의의 결과였다. 

 

또한 내조 중심이었던 청와대 제2부속실의 역할은 아동과 여성을 위하는 일로 확대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여성장관, 4대국 여성 대사의 등장, 국가인권위원회 등은 이희호 여사의 노력이 반영된 결과였다는 평가가 많다. 

 

또한 2002년 5월 유엔 총회 의장국 대표로 임시의장을 맡아 회의를 주재하고 기조연설을 한 첫 여성이 되기도 했다. 

 

이런 이희호 여사를 그 누구도 김대중의 부인으로만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혹자들은 '이희호가 없는 김대중을 생각할 수 없고, 김대중 없는 이희호를 생각할 수 없다'고 이야기할 만큼 이희호 여사의 역할은 컸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이희호 여사가 가지는 의미도 남달랐다. 

 

1983년 미국 망명 시절의 김대중 대통령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한 강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아내가 없었더라면 내가 오늘날 무엇이 되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다"

 

한편 이희호 여사의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빈소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된다. 발인은 14일 오전 6시이며 장지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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